
[ 타임즈 - 김시창 기자 ] 도시는 기억으로 완성된다. 눈에 보이는 고층건물과 도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만이 그 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시대를 관통한 이야기,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 공동체의 신념이 켜켜이 쌓여 있다. 경기도 성남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성남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반면 성남은 깊고 울창한 기억의 숲을 간직한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그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바로 도시 곳곳에 자리한 현충시설들이다. 이 탑과 비석, 조형물들은 생생한 역사 교과서이자 후손들에게 바치는 무언의 유산이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성남의 현충시설은 성남공원에 위치한 현충탑이다. 이 탑은 1974년 6월 6일 현충일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성남 출신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이 그 뿌리다. 높이 17m, 폭 17m의 위용을 자랑하는 탑은 정면으로 남향을 바라보고 서 있어 마치 전 시가지를 감싸 안는 듯한 포근한 위엄을 풍긴다. 탑의 중앙에는 거대한 탑신이, 좌우로는 연혁과 헌시가 각각 새겨진 비석이 배치되어 있다. 성남시는 1974년 건립된 태평동 현충탑을 2025년 5월 10일 성남시청 공원으로 이전·건립 완료했다. 이는 노후 시설 개선과 시민 접근성 향상을 위한 숙원사업으로 9개 보훈단체가 입주할 보훈회관(2027년 완공)과 연계된 계획이다.
현충탑에서는 매년 신년참배와 현충일 추모행사가 이뤄진다. 이처럼 성남 시민들의 애국심을 다지고 세대 간 역사의식을 공유하는 소중한 교육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충탑에서 멀지 않은 수정구 수정로의 양지근린공원 내에는 2004년 건립된 호국무공수훈자공적비가 자리한다. 높이 4.75m, 폭 6.2m의 이 비석은 6.25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했던 성남 출신 무공수훈자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세워졌다. 이 비석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지켜낸 오늘의 풍요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하며 계승할 것인가 여부를 묻는 묵직한 질문이다.

중원구 황송공원에는 자유를 위한 투혼을 기리는 베트남참전기념탑이 솟아 있다. 1998년 5월 14일에 건립된 이 탑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이역만리 월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는 공간이다. 높이 19.4m에 이르는 이 탑은 위엄 그 자체다. 냉전 시기,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혼란한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은 파병국으로 참여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
기념문은 그들의 희생이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수호한 대가라고 말한다.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존중받는 국가로 거듭났고 이들의 공헌은 한국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 탑 앞에 서면 전장에서 산화한 젊은 생명들의 이름 없는 외침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분당구 판교역로, 낙생대공원 내 성남 항일의병 기념탑은 성남 출신 의병들의 정신을 담은 가장 최근의 현충시설이다. 2015년 4월 28일에 건립된 이 탑은 주탑과 군상 조형물, 깃발 모양의 비문, 추모 제단 등 다양한 예술적 구성 요소로 이뤄져 있다.
이 탑의 의미는 그 장소에 있다. 낙생대공원은 과거 일제의 군사 훈련장이었으며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 조국 광복을 염원한 의병들의 정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는 것은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분당구 율동공원에 있는 성남 3.1만세운동 기념탑은 성남에서 실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공간에 건립되었다. 2006년 3월 1일, 을사조약 100주년이자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이 탑은 높이 9.5m, 가로 16.5m, 세로 12.8m의 위용을 자랑한다. 특히 당시의 함성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워졌다. 1919년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율리 뒷산 모란봉 정상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작된 이 운동은 27일 분당장터로 이어졌고 무려 3천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탑이 서 있는 장소 자체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새긴 이 탑은 성남 시민의 자긍심이자 독립운동의 유산을 후대에 알리는 소중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중앙공원 역말광장 인근의 6.25참전유공자 명비다. 이곳은 가장 최근에 조성된 현충시설이다. 2022년 11월 15일 성남시와 경기동부보훈지청이 함께 건립한 이 명비는 지름 10.8m의 태극 문양 바닥 위에 8개의 비석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거기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가 수많은 전장을 살아낸 용사들의 생애를 대변한다.
성남의 현충시설을 따라 걷는 길, 그 길 위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다. 수십 년 전 또는 백 년 전 한 청년이 품었던 나라를 위한 순수한 열망이 오늘 우리가 사는 도시의 공기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남이라는 도시의 진정한 품격은 어쩌면 이 조용하고 단단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이 도시의 뿌리를 느끼고 싶다면 그 기억들을 따라 걷는 것부터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