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임즈 - 김시창 기자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에 위치한 정충묘는 병자호란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곳은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며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는 공간이다.
1636년(인조 14) 겨울 조선은 청나라의 침략을 맞닥뜨렸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왕을 구하기 위해 근왕군이 조직되었다. 경상도에서 조직된 4만 명의 군대도 북상을 시작했지만 이들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군과 마주하게 된다.
쌍령 전투는 청군과 조선군이 예상치 못한 전장에서 맞붙어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공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안동영장 선세강 등이 지휘하던 조선군은 숙련된 포수들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탄약이 바닥나고 화약을 급히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청군이 손쉬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의 정예 팔기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로 꼽히던 바야라 호군이 큰 손실을 입었다. 또 지휘관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전투를 기피한 군사들이 처벌받는 등 혼란이 극심했다. 하지만 결국 조선군은 패배했다. 이 패배로 인해 경상도 근왕군의 동원이 좌절되면서 병자호란의 전체적인 전세가 청나라에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이러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경기도 광주 대쌍령리다. 여기에 자리 잡은 정충묘는 전사한 네 명의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사당 입구에는 붉은 색의 홍살문이 세워진 가운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홍살문을 지나면 계단을 따라 정충묘 본당으로 이어지는데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반의 아담한 규모로 이뤄졌다. 또 내부는 통칸으로 설계됐다.

사당의 구조는 소박하면서도 품격을 갖추고 있다. 방형초석 위에 방형기둥을 세우고 도리와 보를 결구한 민도리 형식의 건축 구조를 채택했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지붕은 팔작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와골은 막새로 마무리되어 전통적인 사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정면에 4짝의 분합문을 설치하여 개방감을 주면서도 적벽돌로 마감된 화방벽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1월 3일) ‘정충묘 제례’가 봉행되는 살아있는 역사 공간이다. 광주문화원이 절차를 주관하며 지역 주민들도 함께 참여해 장군들의 충절을 기린다.
아울러 정충묘 경내에는 김태선 효자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태선은 안동 김씨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며 극진히 간호했지만 끝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이에 그의 지극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효자비를 세웠다.

효자비는 1920년대에 건립되었으며 1989년에는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안내판과 보호책이 설치되었다. 이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도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유산이다.
정충묘는 병자호란의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군들의 넋이 서린 장소다. 다만 많은 이들이 병자호란 관련하여 남한산성만 기억할 뿐 다소 소외된 안타까운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충절과 효심이라는 한국 전통 가치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우리의 역사와 정신을 되새기게 만든다. 이곳을 둘러보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충절, 효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여행을 추천한다.